제 16회 정쿱전력
- 사랑이 잘
- 착각하면 좋아 기분이
* 이 글은 그럴듯한 생리의학적인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나 상당부분이 허구입니다.
- 연인이 이제는 친구 같이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이 잘 안 된다고 느껴지시나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소개합니다. 현대판 사랑의 묘약, <러브어게인>을 사용해 보세요. 길어야 30개월 남짓이었던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어집니다. 이 약의 원리는, 뇌의 중심부에 도파민 수용기를 자극해...
쇼호스트의 현란하고 이과적인 설명들이 정말 하나도 흥미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던 정한이는 며칠 뒤 우리 집으로 그걸 시켰다. 택배 상자에는 <러브어게인>이라는 후진 굴림체의 상표가 박힌 알약 통이 두 개 담겨 왔다. 가격도 만만치 않던데. 무이자 할부 삼 개월 끊어서, 한 달에 삼만 삼천원씩 총 구만 구천원을 긁었다. 물론 그건 우리의 공동 생활비였다. 식비, 주거비, 공과금이 아닌 사랑을 위한 비용으로 가계부에 삼만 삼천원을 기록해야 한다는 게 어색했다. 이 알약에 대한 부정적인 첫인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이걸 쓸 정도의 관계라고 생각했다면 그냥 헤어지자고 하지 그랬냐.
정한이는 말 없이 약통을 열어서 알약 몇 개를 손바닥 위에 굴렸다. 꼭 불량식품 같이 불그스름한 하트 모양의 알약들이 정한이의 손 위를 굴러다녔다. 비주얼부터 께름칙했다. 현대판 사랑의 묘약이라더니 이걸 개발한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알약과 함께 배송되어 온 설명서를 열었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자는 상표와 마찬가지로 굴림체로 작성되어 있었다.
<러브어게인>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한 특효약.
부작용 : 과도한 도파민 분비는 환각이나 편집증 증세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성인 기준 1일 1회 1정 복용 권장.
여전히 못 먹겠다는 듯 알약을 손 위에 올려둔 채 응시하는 나를 보며 정한이가 툭 던지듯 말했다.
- 최음제라고 생각해, 그냥.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가 한층 유쾌해지자, 꺼려지는 하트 모양의 알약도 기꺼이 물과 함께 삼킬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약발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로맨스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는 VOD 채널을 몇 번이나 휘적거리다, 결국 1996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틀었다.
- 야. 로미오와 줄리엣은 너무 오래 되지 않았냐?
- 갑자기 보고 싶어서.
소파 위에서 우리 둘은 딱 붙어서 영화를 봤다. 스물 두 살의 디카프리오의 찬란한 얼굴이 스크린을 메웠다. 조금씩 영화에 빠져들 무렵,
- 이게... 약발인가?
윤정한이 뜬금없는 소릴 했다.
- 뭐가.
- 너 되게 잘생겼다.
뭐래는 거야. 지가 더 잘생긴게. 그래도 오랜만에 잘생겼다는 소리 들으니까 기분은 좋았다. 내가 기분이 살짝 뜬 걸 빠르게 눈치 차린 정한이가 내 어깨에 아예 머리를 기댔다. 물론 이 정도는 늘 있었던 스킨십인데, 오늘은 문득 그 날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피곤하다며 처음으로 머리를 기댔던 날. 심장 쿵쾅거려서 사람 잠 한 숨 못 자게 해 놓고 지는 잘만 잤던 그 날.
- 진짜 장난 아니고, 디카프리오 얼굴 보다가 너 보면 못생겨야 되는데, 너 지금 진짜 잘생겼다?
- 약빨 장난 아니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큭큭거렸지만 그 날이 다시 생각났다는 것만으로 이 약이 장난이 아닌 것만은 이미 확실했다.
- 아. 나도 약빨 좀 받는 것 같다.
- 왜?
- 너 그 날 생각나? 우리 수학여행 날에. 니가 피곤하다고 나한테 기댄 날. 그 날 생각난다.
- 잠 좀 자고 싶어서 기댔는데 니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못 잔 날?
- ... 안 잤냐 너?
정한이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아 진짜 윤정한..... 어깨를 장난스럽게 흔들어서 정한이 머리를 떨궈냈다. 장난기가 좀 가라앉고, 우리는 영화 속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먼저 키스했다.
1일 1회 1정의 효과는 실로 위대했다. 어련히 잘 일어났겠지, 어련히 잘 챙겨먹었겠지, 하고 넘겼던 일들이 참을 수 없이 궁금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곤 했다. 주변 사람들은 요즘 왜 이렇게 실실거리냐고 갈궜고, 그 와중에 눈치가 빠른 친구는 너 혹시 새로운 사람 생겼냐고 조심스레 떠 보기도 했다. 야 헛소리하지마. 나 여전히 정한이랑 잘 사귀니까. 미안미안. 너네 권태기 극복했구나? 차마 약 먹고 극복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연애 초로 되돌아간 것 같은 몇 달이 지나고, 우리가 사귄지 6년째 되는 기념일이었다. 그냥 화려하게 챙기진 말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거나 먹자고 했다. 회사에서 막 퇴근해서 바로 레스토랑으로 피곤한 기색의 정한이가 들어왔다.
- 오늘은 어땠어?
- 나 너무 스트레스 받으니까 묻지 좀 말아줄래. 너무 힘들었어.
... 오늘 우리 기념일인데. 못내 섭섭했지만 사람은 언제든 힘들 때가 있는 법이니까. 애써 이해하려고 하며 메뉴판을 넘겼다. 마치 권태기에 한 번 도달했었던 그 때의 우리가 다시 오버랩되었다. 다시 까칠해진 정한이도, 말 한마디에 권태기가 되돌아온 나조차도, 약효가 다 한 걸까. 내심 생각했다.
- 정한아. 내가 너 속상할까봐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 응.
- 우리 약으로도 이제는 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된 거 아닐까.
미안, 진짜 미안해. 내가 그렇게 말해서 화났어? 내가 잘할게 승철아. 진심이 담긴 말들이 귀를 때렸지만, 더 이상 화학물질에 속지 않게 된 뇌는 몇 달 전 그 때보다도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당장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같이 구한 집은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고, 같이 모아 둔 돈과 같이 사는데 익숙해져 버린 생활패턴들. 천천히 정리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리고 아직 약이 오만 원치는 더 남아 있었다. 약효가 아주 가버린 것은 아니어서, 처음의 그 두근거림까지는 아니더라도, 금이 가 버린 관계를 붙잡고 있을 정도는 되었다.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약을 바로 끊을 수는 없었다. 그 날 저녁에도 약을 먹으려고 약통을 열었는데, 어쩐지 부쩍 줄어 있는 기분이었다. 기분 탓이려니 하고 한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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