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 번째 주간원겸
- 청춘
- 네가 웃는 게 좋아
열 아홉살의 덜 익은 짝사랑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지 그 때는 몰랐었다.
- 뭐 쓰냐 미친놈아.
- 니 얘기.
점심 시간 내내 공을 차더니 땀과 흙먼지 가득 머금고 들어온 수현이 원우의 어깨를 꽈악 눌렀다. 아파 새끼야. 너 맨날 소설가 된다고 책이나 보고- 어- 남자가 땀냄새가 나 줘야지 향수나 뿌리고 다니고 말야- 하고 수현은 원우의 어깨 위로 몸을 낮춰 공책을 들여다보았다. 뭐냐? 이 오글거리는 문장은? 니 얘기라고 새끼야.... 킥킥거리던 수현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지더니, 원우를 내려다보았다.
- 야. 전원우.
- 왜?
- 나 부탁 하나 해도 되냐.
*
- 왜 있잖아. 옆 학교에 김지혜 친구 중에 여왕님 같은 애.
- 한주연?
-어 걔. 너도 알면 쉽겠네. 너 고백하는 편지 한 장만 써 주면 안 되냐? 내가 노력을 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진심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어서.
- 내가 니가 아닌데 어떻게 니 진심을 내가 담아주냐.
- 니가 쓴 글이 내 진심보다 더 나을 수도 있는데?
- 아, 싫어. 안 할래.
- 전리품 상자 열한개 까줄게.
*
그렇게 수현이의 진심은 원우의 손에서 두 시간만에 완성되었다. 완성된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봐도 어느 한 구석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없어서,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서, 전리품 상자 열 한개와 함께 전원우는 남고의 전설이 되었다. 쟤가 바로 연애 편지 한 장으로 한주연을 꼬셨다.. 라는 다소 왜곡이 들어간 어휘긴 했지만 어쨌든 연애 편지를 성공했다는 사실이 우쭐하긴 했었다. 수현은 다음날 원우에게 절을 하며 매점 빵까지 사다 바쳤다. 그 날 이후로 원우의 책상에는 종종 많은 의뢰들이 도착했다. 고백 편지는 물론 싸우고 화해의 편지, 헤어진 여친을 다시 붙잡아 달라는 구질구질한 의뢰까지. 고등학생 입장에서 한 건당 받는 돈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서, 원우는 게임 과금을 하기 위해 고3임에도 불구, 야자시간까지 열심히 펜을 놀렸다.
- 저기. 혹시 전원우 선배 좀 불러주실 수 있나요.
그 날도 어김없이 문 밖에서 어떤 사람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후배인 듯 했지만 성숙한 느낌이 물씬 드는 남학생이었다. 의뢰하러 온 건가. 야. 얘가 너 찾는데. 수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원우는 복도로 나섰다.
- 저.. 돈만 드리면 무엇이든 써 주시는 건가요?
- 일단. 내용을 보긴 보는데.
- 너무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고.. 어... 비밀 보장은...
- 당연히 해야지.
남학생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펼쳤다.
2학년 7반 이석민.
- 많은 걸 바라지는 않구요, 그냥. 누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게 써주세요. 혹시라도, 혹시라도 남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거 알고 역겨워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면. 그냥 제가 직접 고백할 수 있게요.
너 걔 되게 많이 좋아하나 보구나.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 태도를 관찰하는 습관이 배어 버려서, 원우는 벌써부터 진심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이 길고 긴 이야기들을 어떻게 엮어서 전달해줘야 좋을 지. 남자한테는 또 어떤 식으로 글을 쓰면 좋을 지. 원우는 이번 일은 조금 무거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석민을 처음 마주친 건, 매점. 수현과 함께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원우의 귀에, 우연히도 2학년 두 명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야 김민규. 나 잔돈 모자란데 이백 원만 빌려 주면 안 되냐?
- 그렇게 밀린 돈이 만 원이 다 되어 가는 건 아냐?
- 만원 채워서 갚으면 되잖아.
별 특이한 놈들 다 보겠네.. 하며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이석민이라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2학년의 색깔, 노란색. 쟤구나. 첫 인상은... 어, 착하게 생겼네. 좋아할 만한 매력이 있다면,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르겠네. 원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현은 오늘도 프로필사진으로 바꿀 한주연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물고도 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수현에게 원우가 나지막히 물었다.
- 넌 왜 걔를 좋아해?
- 예쁘잖아.
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수현이 대답했다.
*
- 넌 걔를 왜 좋아해?
남학생은 눈도 못 마주치고 대답했다.
- 웃는 얼굴이 좋아요.
원우는 딱히 메모할 곳이 없어서 손에 집히는 아무 문제집이나 펼쳐 첫 표지 여백면에 이석민, 웃는 얼굴이 좋다. 하고 써 넣었다.
*
체육대회였다. 5월이었지만 이미 여름이나 다름없는 날씨에 남고 특유의 쓸데없는 열기까지 더해져 각자 얼음물을 뺨에 대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 이거 다음엔 뭐래?
- 계주. 전원우 너 나가?
- 어. 아마도.
- 2학년 계주 다음이래. 대기타.
계주 출발 대기선에 수현과 나란히 걸터앉은 원우의 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2학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 뭐야. 이석민이네. 친구들이랑 떠드는 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연광을 받아서 유독 빛나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하게 드러내는 미소에 문득 그 아이가 한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진짜 웃는 모습이 화하다는게 그런 얘기구나. 싶어서, 원우는 마음 한구석이 문득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 때 까지는, 괜찮다. 고 생각했다.
퇴고 없이 써내려가는 편인데, 이번에는 왜 이리도 문장을 엮는 게 어려운지, 같은 어미들은 왜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고, 주술은 왜 또 안 맞는 건지. 제일 쓰기 어려운 글이 연애편지라고 하던 혹자의 말에 그게 왜 어렵지? 하며 혼자 써내려가곤 했던 문장들이 오늘은 유독 나오지를 않아 애꿏은 펜만 빙빙 돌린다.
*
- 야. 이거 뭐냐?
사물함 틈 사이에 끼워진 편지를 본 민규가 재빠르게 잡아뺀다. 그래도 남에게 온 편지를 먼저 뜯어볼 정도로 친구 간 예의를 상실하지는 않아서, 체육복을 갈아입다 말고 호닥 뛰어온 석민에게 바로 넘겨준다.
- 편지 같은데?
- 연애 편지 아냐?.... 미친. 너한테?
- ... 나 무시하냐?
너한테 안 보여 줄래. 석민은 편지봉투를 가방 안에 쏙 넣어버린다. 내심 궁금했던 듯 민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예상보다 석민이 단호하게 나오자 포기한다. 뭐, 나중에 다 말해 주겠지.
석민은 읽었다. 벌써 다섯 번 째. 남의 진심으로 가득가득 들어찬 유려하면서도 서툰 듯한 문장들을 계속해서,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이게 정녕 자신을 찬미하는 문장들이 맞는지, 이 학교 어딘가에 누군가가 내 생각을 하루 종일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지, 놀란 마음이 진정된 뒤에도 계속해서 뛰는 심장에 석민은 다섯번 째 편지 읽기를 마치고 편지로 눈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내쉬는 깊은 한숨. 코 끝으로 밀려드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
- 3학년에 대필로 유명한 선배 있대.
- 두 시간만에 쓴 편지로 옆 학교 여신 꼬셨대.
친구들이 가볍게 브리핑했던 학내 가십거리들이 이제 와서 뜬금없이 떠오르는 건 뭔지. 쎄한 느낌이 자꾸 오감을 자극했다. 이렇게 물 흐르는 듯한 고백의 문장들은 아직은 서투른 사랑이 더욱 익숙한 열 여덟살의 나이에게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어색함 속에서도 단 하나 마음 속을 깊게 파고들었던 문장은 '네가 웃는 게 좋았다'라는 그 말. 마치 원우가 계주 대기줄에 앉아서 석민이 웃는 모습을 처음 봤던 그 날의 감정이, 그 어떤 미사여구 하나 안 붙은 문장 속에 그대로 녹아있었던 것처럼.
*
원우는 그 이후로 대필을 그만뒀다. 전리품 상자 스물 네 개를 까준대도 거절했다.
석민은 그 이후로 복도에서 우연히 원우와 스쳤다. 석민은 익숙한 라벤더 향기에 잠시 어? 하며 멈춰섰다. 하지만 워낙 순간적으로 스쳐간 탓에 어디서 맡아본 향기더라? 까지는 미처 떠오르지 못했다. 민규가 이석민 안 오고 뭐해? 하자 으응,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
석민에게 고백하러 찾아온 애는, 확실히 그 향기가 나는 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편지지에 배인 향수 냄새가 아닌, 그저 편지지에 입힌 향기일 수도 있었지만, 석민은 거의 대필임을 확신했다. 나름 방송부 활동 하느라 발이 넓은 민규한테 2학년에 대필로 유명한 선배 아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민규가 편지에 대한 내용을 추측할 게 뻔해서 그만뒀다. 대필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석민의 서랍 속에는 여전히 그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저 대필일 뿐임을 알면서도, 문장 너머에서의 진심이 자꾸만 울렁이는 듯 해서 석민은 편지를 버릴 수가 없었다.
*
수능이 끝나고, 3학년 교실은 텅 비고, 민규와 석민을 비롯한 2학년 학생들은 3학년들이 화형식 하듯 쌓아놓은 책 더미에서 쓸만한 책들을 고르고 있었다.
- 야 진짜 3학년들 공부 한 개도 안 하나봐. 완전 새책 개많은데?
이미 과목별로 모든 문제집을 찾는데 성공한 민규가 책을 한가득 안고 석민에게 소리쳤다.
- 그러게. 죄다 앞에 한 두장만 풀고 - 어?
석민은 우연히 집어든 문제집을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놀라 주저앉을 뻔 했다.
이석민. 웃는 모습이 좋다.
- 헐. 헐...
- 뭔데, 뭔데? 뭐야. 다 쓴 책인데?
민규가 석민에 손에 들린 책을 후루룩 넘기더니 무감흥한 표정으로 다시 넘겨줬다.
- 아니 김민규... 여기 봐봐.
- 뭐야? 니 이름이 여기 왜 써있어?
- 내 말이...
표지를 다시 넘겨 본 민규가 묻는다. 전원우? 너 아는 선배야?
- .... 어쩌면?
익숙한 글씨체,
-이제는 다 날아가 버렸지만- 오랫동안 그려왔던 라벤더 향기,
그리고 그렇게 찾았던 이름.
전원우.
* 라벤더의 꽃말은 '나에게 대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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